요르단 페트라, 성배를 찾아 떠난 장밋빛 붉은 도시

입력 2018-07-15 15:05  

여행의 향기



한낮의 불같은 태양이 머리 위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붉은빛을 띤 사막의 산들이 그 엄청난 태양열에 녹아내릴 듯 하얗게 빛나고 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모래밭을 걷는 노새나 낙타도 이 같은 날에는 견디기가 어려울 것이다. 여기는 중동의 한쪽 요르단(Jordan)에 있는 ‘페트라(Petra)’라는 곳. 사막 속의 험악한 산들 곳곳에 고대 유적지가 산재해 있어 폭염 속에서도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오전에 그리 많던 관광객도 모두 어디로 가고 보이지 않는다. 모두 나처럼 텅 빈 동굴을 하나 골라 낮잠을 자고 있는 것일까. 아직도 볼거리는 많은데 어떻게 이 불같은 햇볕을 헤쳐나가야 할지 뚜렷한 대책이 없다. 동굴 속에서 세상 몰라라 하고 한숨을 자고 나니 지친 몸이 한결 낫기는 하다. 하지만 그 불같은 태양 아래로 다시 선뜻 나서지를 못하면서 혼자 중얼거린다. “빌어먹을, 구경하기도 힘들구먼! 힘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니까.”

나바티안 왕국이 세운 번영의 상징

페트라는 요르단 남쪽에 있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유적지들의 규모나 아름다움이 대단해서 유네스코의 보존 문물로 지정돼 있을 정도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잘 알려진 곳이 아니다. 하지만 꼭 생소한 곳만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많은 분의 기억 속에는 이미 이 페트라의 독특한 자연과 유적들과의 만남의 흔적이 어렴풋이나마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성배를 찾아서’ 편에서 주 무대로 등장하고 있는 곳이 바로 이 페트라다. 영화 속 그 신비의 성전이나 협곡들이 모두 사실 그대로 이 페트라에 남아 있다. 그러다 보니 현실에서도 영화 속 한 장면을 보는 듯해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 장밋빛 유적의 도시 페트라의 역사는 아주 깊다. 그 첫 번째 주인은 기원전 13~6세기에 번영을 누렸던 ‘에돔(Edom)’ 왕국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여호와나 마호메트 같은 유일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해와 달을 숭배하는 범신교도들이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너희들은 어찌하여 하나님을 믿지 않느냐. 이 독수리 같은 놈들아. 바위틈에서 잡신을 믿지 말지어다”라고 호통친 적이 있다고 성서에 전해진다.


그러나 진정 이 페트라의 영광을 일깨운 사람들은 따로 있다. 기원전 6세기를 넘어서면서부터 요르단 지역을 지배하던 아랍족, ‘나바티안’들이 이곳으로 옮겨와 왕국을 이룩하면서부터다. 그러니까 로마제국 이전부터 이 나바티안들은 이곳의 자연 지형을 이용해 붉은빛 사암을 파서 독특한 왕궁과 동굴 주거를 만들어 가며 왕국의 기반을 다져간 것이다. 그 전성기 시절에는 다마스커스, 북아랍뿐만 아니라 시나이 반도까지 그 세력을 손아귀에 넣어서 중국과 로마를 잇는 실크로드 선상의 무역로를 장악해 엄청난 부를 누리기도 했다. 지금 이 페트라에 남아 있는 많은 유적지 중에서 대다수가 이 나바티안 왕국 시절의 것이다.

스위스 여행가가 발견해 세상에 알려져

하지만 이 왕국도 기원 106년에 로마제국에 합병돼 아라비아 지역 로마제국의 일원이 됐고, 그 중심은 이곳 페트라가 된 것이다. 그 후 4세기에 비잔틴 제국이 들어서면서 기독교 세력이 급속히 퍼져나가 이곳 나바티안들은 세례를 받았고, 많은 교회를 세웠으며, 페트라는 그 관할구가 됐다. 하지만 그 번영은 하루아침에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강력한 지진이 엄습해 페트라의 많은 것을 파괴시켜버렸기 때문이다. 그 후로 사실상 사람이 살지 않은 채 방치되고 있다가 7세기에 이슬람 세력이 밀고 들어오면서 이곳 페트라는 보잘것없는 조그마한 부락으로 전락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말았다.


1812년 열렬한 무슬림 학자로 위장한 스위스의 한 젊은 여행가가 이 지역을 여행하다 이곳의 엄청난 유적들을 발견하게 돼 페트라는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됐다. 실로 잠들어 있은지 천년 만의 세월이다. 그 기간에 이곳 페트라는 오로지 아라비아 사막의 떠돌이인 ‘베두인’족과 그들의 동물들 안식처가 돼왔다.

일명 ‘장밋빛 붉은 도시’라고도 불리고, ‘인디아나 존스’의 무대이기도 한 이곳 페트라를 보기 위해서는 거금 40달러나 되는 입장료를 부담해야만 했다. 이것은 사흘 동안 구경할 수 있는 입장료다. 워낙 범위가 넓고 볼거리가 많아서 하루 이틀 가지고는 땀흘리고 다리 아픈 것 말고는 아무 기억도 남지 않을 것 같아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단체 관광객은 한나절에 모든 것을 두루 섭렵하고 의기양양하게 떠나간다. 재주도 참 좋은 사람들이다.


사흘째 되던 날에도 아침부터 태양은 불같이 내리 쬐고 있었다. 오늘도 ‘시크(siq)’라고 불리는 길다란 통로를 지나 영화(映畵)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오늘은 정말 성배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듯이 말이다. 태양볕을 차단하고 있어 그런대로 걷는 데 시원함을 주고 있는 이곳은 마치 ‘블랙홀’을 연상케 하는데, 수십m 높이의 절벽과 절벽 사이의 비좁은 틈새가 2㎞나 이어진다. 이따금 말을 탄 소년들이 지나갈 뿐 바깥 세상은 절벽 위쪽 틈새로 보이는 조각난 하늘을 빼고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

도굴꾼들의 손길 탄 알 카즈네 사원

블랙홀에 빨려들어서 꿈을 꾸듯 걷다 보니 오늘도 역시 이 좁은 통로가 끝나는 틈새에서 분홍빛 보석이 찬란히 빛나고 있다. 페트라의 첫 번째 놀라움을 안겨주는 ‘알 카즈네’ 사원이다. 이 틈새에서 첫날부터 지금껏 수십 번은 쳐다보았을 법한데도 언제 봐도 싫지가 않은 멋들어진 풍경이다. 정말 저 속에 들어가면 뭔가 신비스러운 것이 있을 법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그래서 이 사원을 일명 ‘보고(寶庫)’라고도 부르는 것일까. 이 사원은 기원전 1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고전적 헬레니즘 건축 양식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데, ‘나바티안’ 왕이었던 아레타스 3세의 무덤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훗날 이곳은 왕의 명성을 찬배하고 숭배하는 사원으로 쓰였던 것 같다고 학자들은 전한다. 거대한 바위벽을 깎아 만든 웅장하고 화려한 이 사원의 정면에는 몇 개의 둥근 기둥과 섬세한 조각상들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모두가 나바티안들의 신화적인 내용과 죽음을 예찬한 것이다.

그러나 겉보기와 달리 안에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다. 마치 누군가가 몽땅 쓸어간 것처럼…. 그래, 이 속에 아무것도 없었을 리가 없다. 이곳을 ‘보고’라고도 하지 않은가. 워낙 오랜 세월 동안 버려져 있었기 때문에 도굴꾼들의 손길을 피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보지 못했겠지만, 사라진 것들 중에는 영화 속에서 나오는 ‘성배’와 같은 신비스러운 것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볼 만하다.

이곳이 근세에 들어서도 도굴꾼들의 손길이 미쳤다는 것을 증명할 만한 게 사원 정면에 남아 있다. 무수한 총탄 구멍들이다. 현지인들의 말에 의하면 이곳을 일컬어 ‘보고’라고 말하는데는 분명 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슬람 도굴꾼들이 내부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하자 이 사원의 정면 어딘가가 의심스러워 총탄으로 부숴가면서 찾으려고 애를 썼다는 것이다. 결국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지만 말이다. 세월의 무게를 알 리 없는 낙타 한 마리가 이 문전에서 관광객의 좋은 피사체가 돼주고 있다.


발길을 돌리는 곳마다 붉은 사암을 파서 만든 왕족이나 귀족들의 무덤, 교회, 아니면 나바티안들의 동굴 주거다. 입구에는 한결같이 섬세한 조각이 돼 있다. 이런 곳들 역시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다. 단지 벽면의 바위 무늬들이 썰어 놓은 연어 살처럼 독특할 뿐이다. 또 공터에는 예전의 장터 흔적이 있고, 로마시대에 만든 돌기둥들이 길을 따라 뻗어 있는 곳도 있다. 이런 곳을 찾아다니면서도 눈과 손은 따로 논다. 눈은 나바티안의 영광을 살피기에 정신없는 반면 손은 몇 걸음마다 물병만 찾는다. 지독히도 더운 곳이다. 확 트인 벌판에서는 사막의 뜨거운 열기가 이글거리는 가운데 꼬마들 몇이서 노새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 저 벌판에 오래 있다가는 미라가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레크로폴리스’라는 야외극장에서 잠시 발길을 멈춘다. 이런 건 로마 유적지에서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지만 이곳은 나바티안 왕국의 황금 시절에 지어진 것이다. 8000명이 넘는 관객이 들어설 수 있는 규모지만 역시 이곳을 엄습한 지진으로 파괴돼 세월의 무게만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모세가 지팡이로 물 찾은 ‘모세의 샘’ 이채

어딘가의 ‘와디무사’라는 곳에는 ‘모세의 샘’이 있다고 하는데 더위에 지쳐서 찾지를 못했다. 그 옛날 이집트에서 모세가 자신의 백성들을 이끌고 맨 처음 요르단으로 들어온 곳이 이 페트라 지역이었다. 그때 목말라하는 백성을 위해 지팡이로 바위를 쳐 물이 나오게 했다는 바로 그 샘인 것이다. 그 샘이 지금까지도 이곳 사람들의 중요한 식수원이 되고 있단다. 이 밖에도 이곳 페트라는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가 많아 기독교도들의 성지가 되고 있다. 그래서 연일 몰려드는 단체 관광객의 대다수가 세계 도처에서 몰려드는 기독교도들이다. 이 중에는 한국인 성지 순례단도 어김없이 끼어 있다.

이곳 페트라의 유적 중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은 ‘에드 데이르’라는 사원이다. 바윗길을 타고 돌면서 외롭게 고군분투해야만 만날 수 있는 곳이기에 단체객은 별로 찾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분위기가 살아나는 멋진 곳이다. 생김새가 알 카즈네와 비슷하지만, 이곳 페트라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이곳 역시 처음에는 왕가의 무덤이었으나 4세기 비잔틴 시대에 사원으로 사용하면서 성직자나 신도들의 중요한 순례지가 됐다고 한다.

사원 앞 언덕 위에 올라 저물어가는 태양빛에 붉게 물들어가는 사막의 산들을 바라본다. 저 밑 어딘가에서 베두인족이 염소 떼를 몰고 있다. 오늘날 나바티안들은 사라지고 이곳의 주인은 바로 그들이다. 곳곳의 비어 있는 동굴은 그들의 좋은 안식처가 되고 있다. 바위를 파서 만든 집들이니 앞으로도 천년 묶기다. 그래서 옛 관습대로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옛 나바티안들의 생활을 그려볼 수가 있다. 황혼빛에 물들어가는 사원을 바라보면서 지난 시대의 영광을 떠올려본다. 오늘날 이곳 페트라는 심오한 대자연의 불가사의뿐만 아니라 나바티안의 영광을 고증하고 있는 곳이었다.

요르단=글·사진 박하선 여행작가 hotsunny7@hanmail.net

여행 정보

국내에서 요르단으로 바로 가는 항공편은 없지만 홍콩이나 방콕에서 요르단 수도인 암만으로 갈 수 있다. 한국 관광객에게는 무비자 입국을 허용하기도 하고, 공항에 도착해 도착 비자를 쉽게 받을 수 있다. 암만에서 페트라로 가는 고속버스가 자주 있다. 대략 3~4시간 걸린다. 이집트 시나이 반도에서 배를 타고 들어올 때는 아카바항에 도착해 합승택시를 타고 페트라로 바로 갈 수 있다. 페트라는 입장료가 비싼 편이고, 1일, 2일 또는 3일 입장권으로 나뉘어져 있다. 관광할 시간이 별로 없으면 1일 입장권을 구입해 들어가지만, 더 차분하게 충분히 둘러보고 싶은 분들은 3일 입장권을 권장한다. 4월부터는 엄청 뜨거운 날씨이니 음료수를 필히 지참해서 다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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